모리 히데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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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리 히데나리는 조슈번의 초대 번주로, 1595년에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영지가 삭감되었지만, 1623년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조슈번을 통치했다. 초기에는 숙부 모리 히데모토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점차 히데모토와 대립하며 번주로서의 권력을 확립했다. 1651년 사망했으며, 넷째 아들 모리 쓰나히로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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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히데나리 | |
---|---|
기본 정보 | |
![]() | |
휘 | 히데나리 |
이명 | 쇼주마루 (松寿丸) (유명) 후지시치로 (藤七郎) (통칭) 히데나리 (秀成) (히데나리의 처음 이름) |
시호 | 다이쇼 공 (大照公) |
계명 | 다이쇼인덴젠니슈다이슈시본하린지쇼겟칸쇼조다이고지 (大照院殿前二州太守四品羽林次将月礀紹澄大居士), 다이쇼인겟칸쇼조 (大照院月礀紹澄) |
묘소 | 야마구치현하기시 쓰바키아오우미의 다이쇼인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분로쿠 4년 10월 18일 (1595년 11월 19일) |
사망 | 게이안 4년 1월 5일 (1651년 2월 24일)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우고노에곤노쇼쇼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번 | 조슈번 번주 |
씨족 | 모리 씨 |
가족 관계 | |
부 | 모리 데루모토 |
모 | 니노마루도노 (세이타이인) |
형제 자매 | 히데나리, 다케히메 (깃카와 히로마사 정실), 나리타카 |
배우자 | 기사히메 |
자녀 | 쇼주마루, 이즈미노카미, 다이키치마루, 쓰나히로, 도사히메, 다케히메 외 |
기타 정보 | |
소속 | [[파일:Alex K Hiroshima Mori (color).svg|15px]] 모리 씨, [[파일:Tokugawa family crest.svg|15px]] 도쿠가와 막부 |
지휘 | 조슈번 |
참전 | 오사카 전투 (1614-1615) |
2. 생애
모리 히데나리는 분로쿠 4년(1595년) 10월 18일 축시(오전 1시부터 오전 3시경)에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으로 아키 히로시마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쇼쥬마루였다.[1][2] 게이초 4년(1599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에보시 오야로 삼아 원복을 치르고, 히데요리의 편휘를 받아 히데나리로 개명했다. 또한, 히데요리의 근신이 되어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1614년부터 1615년까지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나리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것이 히데나리의 첫 출진이었다.[1] 1614년 12월 19일, 도쿠가와 측과 도요토미 측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자, 모리 가문은 오사카 성의 해자(垓字) 매립 토목 공사를 도왔다.[1]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아오야마 타다토시와 이타쿠라 시게무네를 히데나리에게 파견하여 해자 매립을 서두르도록 통지했다.[1] 1615년 1월 23일에 해자 매립이 완료되었고, 히데나리는 모리 히데모토와 함께 귀국했다.[1]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5월 8일에 오사카 성이 함락되어 종전되었기 때문에 뒤늦게 참전하였다.[1]
겐나 9년(1623년) 9월 10일, 히데나리가 에도에서 귀국하여 하기성에 입성하자, 아버지 모리 데루모토로부터 가독 양도 의식이 거행되어 정식으로 히데나리에게 가독이 양도되었다.[3] 이에 따라 히데나리가 단독으로 조슈 번주가 되었지만, 번정은 후견인인 히데모토, 마스다 모토요시, 시미즈 카게하루 등이 담당하여 히데나리에게는 권력이 거의 없었다.
간에이 2년(1625년), 히데모토가 중심이 되어 일문을 포함한 가신단의 대폭적인 영지 교체를 실시했다. 영지 교체의 예는 다음과 같다.
대상자 | 기존 영지 | 이동 영지 |
---|---|---|
모리 모토토모 | 스오국 구마게군 미츠오 | 사바군 우다 |
모리 모토카게 | 스오국 구카군 스기모리 | 나가토국 도요우라군 아카와 |
모리 모토카네 | 나가토국 도요우라군 아카와 | 스오국 요시키군 요시키 |
후쿠하라 모토토시 | 스오국 요시키군 요시키 | 나가토국 아사군 우베 |
시시도 모토마사 | 스오국 사바군 우다 | 구마게군 미츠오카 |
간에이 3년(1626년), 오고쇼·히데타다, 쇼군·이에미쓰 부자를 따라 조락하여,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성 행차에 수행원으로 참가하여 우콘에노곤쇼에 임명되었다.
히데나리는 점차 히데모토와 대립하게 되었고, 1631년에 히데모토가 후견인을 사임한 이후에는 불화가 심각해졌다. 1634년에 히데모토가 독립을 꾀하거나 에도성 축성을 거부한 일로 인해, 사태를 우려한 막부의 중재로 1636년에 히데모토와 화해하여 대립은 종식되었다.[3]
1651년, 하기성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유년 시절
분로쿠 4년(1595년) 10월 18일 축시(오전 1시부터 오전 3시경)[1][2],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으로 아키 히로시마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쇼쥬마루였다.게이초 4년(1599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에보시 오야로 삼아 원복을 치르고, 히데요리의 편휘를 받아 히데나리로 개명했다. 또한, 히데요리의 근신이 되어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2. 2. 오사카 전투
1614년부터 1615년까지 벌어진 오사카 전투에서 모리 히데나리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다. 오사카 겨울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것이 히데나리의 첫 출진이었다.[1]1614년 12월 19일, 도쿠가와 측과 도요토미 측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자, 모리 가문은 오사카 성의 해자(垓字) 매립 토목 공사를 도왔다.[1]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아오야마 타다토시와 이타쿠라 시게무네를 히데나리에게 파견하여 해자 매립을 서두르도록 통지했다.[1] 1615년 1월 23일에 해자 매립이 완료되었고, 히데나리는 모리 히데모토와 함께 귀국했다.[1]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5월 8일에 오사카 성이 함락되어 종전되었기 때문에 뒤늦게 참전하였다.[1] 5월 12일에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마사와 함께 니조 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오사카 성 공격에 늦은 것을 사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애초에 모리에게 출진 명령을 내리는 것이 늦어진 것이 원인이라고 하여 불문으로 처리했다.[1]
2. 3. 번주 취임과 통치
겐나 9년(1623년) 9월 10일, 히데나리가 에도에서 귀국하여 하기성에 입성하자, 아버지 모리 데루모토로부터 가독 양도 의식이 거행되어 정식으로 히데나리에게 가독이 양도되었다.[3] 이에 따라 히데나리가 단독으로 조슈 번주가 되었지만, 번정은 후견인인 히데모토, 마스다 모토요시, 시미즈 카게하루 등이 담당하여 히데나리에게는 권력이 거의 없었다.간에이 2년(1625년), 히데모토가 중심이 되어 일문을 포함한 가신단의 대폭적인 영지 교체를 실시했다. 영지 교체의 예는 다음과 같다.
대상자 | 기존 영지 | 이동 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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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모토토모 | 스오국 구마게군 미츠오 | 사바군 우다 |
모리 모토카게 | 스오국 구카군 스기모리 | 나가토국 도요우라군 아카와 |
모리 모토카네 | 나가토국 도요우라군 아카와 | 스오국 요시키군 요시키 |
후쿠하라 모토토시 | 스오국 요시키군 요시키 | 나가토국 아사군 우베 |
시시도 모토마사 | 스오국 사바군 우다 | 구마게군 미츠오카 |
또한 가신단도 삭감되어, 1622년의 분한장과 1627년의 분한장을 비교하면 약 160명이 감소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는 히데모토의 의향이 크게 작용했다는 지적이 있다. 예를 들어 영지 교체에서 히데모토와 친했던 모리 모토토모와 모리 모토카네는 방장 양국의 요충지인 우다와 요시키로 이동한 반면, 히데모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후쿠하라 히로토시의 아들 후쿠하라 모토토시는 민가도 적고 토지도 척박한 우베로 이동하게 되었다. 히데나리와 인척 관계였던 코다마 가문이 데루모토의 유언을 명분으로 갑자기 해고되었는데, 이 역시 코다마 카게이와가 히데모토와 불화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간에이 3년(1626년), 오고쇼·히데타다, 쇼군·이에미쓰 부자를 따라 조락하여, 고미즈노오 천황의 니조 성 행차에 수행원으로 참가하여 우콘에노곤쇼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히데나리는 점차 히데모토와 대립하게 되었고, 1631년에 히데모토가 후견인을 사임한 이후에는 불화가 심각해졌다. 1634년에 히데모토가 독립을 꾀하거나 에도성 축성을 거부한 일로 인해, 사태를 우려한 막부의 중재로 1636년에 히데모토와 화해하여 대립은 종식되었다.[3] 히데모토의 후견인 사임 후인 1632년에는 의형제인 깃카와 히로마사가 후견인이 되었지만, 실제 번정은 중신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히데모토의 사임으로 번주를 중심으로 한 권력이 확립되었다고 여겨진다.
2. 4. 사망
1651년, 하기성에서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넷째 아들인 모리 쓰나히로가 뒤를 이었다.[1]3. 출생에 대한 이설
모리 데루모토의 장남 히데나리가 히로시마성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덴쇼 19년(1591년) 1월 20일에 나가토국 아토군 시노코노무라(篠生村, 현재의 야마구치현 우베시 오노 지역)의 자이만 나리히사 저택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1][2] 이 설은 누노비키 토시오가 지적한 것으로, 우베시 오노 지역에 남아있는 고문서에 "히데나리는 오노무라에서 태어났다"는 기술이 있는 것을 근거로 한다. 오노 향토사 간담회 회원이 조사한 결과, 아토군 오노무라의 영주였던 자이만가의 문서와 전승으로부터 자이만 나리히사의 저택이 출생지라고 결론지었다.
이 설에 따르면, 데루모토의 정실 부인인 미나미노 오가타를 매우 두려워했던 측실 니노마루노는 임신이 발각되자 비밀리에 자이만가에 숨겨져 출산했다고 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출생 후 처치에 대해 상담한 기록도 발견되었다(자이만가 문서). 자이만 저택 터가 있는 이 지역에는 히데나리 탄생 시 사용되었다는 "산탕의 연못"과 암살을 피하기 위한 "지하실" 등이 남아있으며, 마을 사람들이 히데나리의 성장을 코라 신사에서 기원했다는 전승도 남아있다.
4. 인물
히데나리는 모리 테루모토의 아들로 어려서 고생 없이 자랐기 때문에 젊은 시절 행실이 좋지 못했다. 매일 밤늦게까지 놀아 낮에는 잠이 부족해 서류 결재 등 정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1] 또한, 처음 영지에 들어섰을 때 위압적인 태도를 보여, 히데나리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백성들은 산으로 도망갈 정도였다.[2] 가신들과 히데모토가 간언해도 행동이 개선되지 않자, 아버지 테루모토는 히데나리를 꾸짖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에도의 시모야시키에서 놀며 지내 그 행동이 슨푸의 상인들에게까지 소문이 났다.[3]
한편, 히데모토는 명망이 높았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오토기슈로서 신뢰를 받을 정도였다. 이러한 명망의 차이는 훗날 히데나리와 히데모토의 갈등을 심각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4] 영지가 에치젠기타노쇼번주 마쓰다이라 다다나오가 유배된 분고국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딸을 다다나오의 적자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에게 시집보낸 것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부조리한 혼담"으로 여겨졌지만, "모리님은 천성이 부조리하니까 상관없다"는 이유로 허가되었다(즉, 막부 대신들에게도 가볍게 취급받았다)고 당시 부젠고쿠라번주였던 호소카와 다다토시는 아버지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서신을 보냈다.[5]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전 양형이자 후견인이었던 히데모토나 동생인 나리타카, 인척인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과는 갈등이 있었다. 히데모토는 성인이 된 후에도 히데나리를 경멸했고, 쇼군의 오토기슈임을 내세워 히데나리와 종종 심각한 갈등을 일으켜 막부의 중재를 받기도 했다. 히데모토가 아들 미쓰히로의 정실로 히데나리의 딸을 원했지만, 히데나리가 거절했기 때문에 사이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도쿠야마번의 시조인 나리타카는 같은 어머니를 둔 동생이지만, 조슈번이 자주 테츠다이후신을 명령받았기 때문에 나리타카의 도쿠야마번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도쿠야마번의 재정난을 이유로 거절당하여 나리타카와 사이가 나빠졌고, 이것이 조슈번과 도쿠야마번과의 갈등의 시작이 된다.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후 모리가의 후견인적인 입장에 있었지만, 상당한 긴장 관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겐로쿠 12년(1699년)에는 모리 모토시게의 처우를 둘러싸고 모리가와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이 충돌 직전까지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5. 가계
{| class="wikitable"
|-
! 아버지
| 모리 데루모토 (1553년 ~ 1625년) - 모리 다카모토의 장남
|-
! 어머니
| 세이타인 (1572년 ~ 1604년) - 고다마 모토요시의 딸
|-
! 정실
| 기사히메 (1601년 ~ 1655년)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유키 히데야스의 차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도사|토사일본어히메 | 1617년 ~ 1677년 |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의 아내, 1631년 7월 23일 혼인。가마히메라고도 함。1677년 9월 18일 에도 가치바시 저택에서 사망, 향년 61세, 법명은 고코쿠인덴 교쿠운에겐다이젠테이니, 묘소는 도쿄 쇼소지 |
쇼쥬마루 | ? ~ 1623년 | 요절, 1623년 3월 7일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사망, 법명은 쇼운인덴 세이슈소켄도지, 묘소는 도쿄 즈이쇼지 |
이즈미노카미 | ? ~ 1627년 | 요절, 1627년 7월 19일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사망, 법명은 미야덴인 지쓰소료신다이도지 |
다케히메 | ? ~ 1679년 | 다카쓰카사 후사스케의 아내, 1656년 9월 16일 혼인。1679년 12월 10일 교토에서 사망, 법명은 고세이인덴 주산위 자쿠젠테이신다이시, 묘소는 교토 사가 니손인 |
다이키치마루 | ? ~ 1630년 | 처음 이름은 미야이치마루, 요절, 1630년 10월 21일 에도 사쿠라다 저택에서 사망, 법명은 뇨운료겐젠도지, 묘소는 도쿄 센가쿠지 |
오아구리 | ? ~ 1636년 | 요절, 1636년 3월 20일 에도에서 사망, 법명은 사이카인덴 묘신신녀, 묘소는 도쿄 시바 아타고마치 진푸쿠지 |
모리 쓰나히로 | 1639년 ~ 1689년 | 조슈 번 제2대 번주 |
생모 불명의 자녀 | ||
(남자) | ? ~ 1624년 | 계도에 기재되지 않은 인물, 고야산 안요인 과거장 근거。1624년 1월 12일 사망, 법명은 겟쇼인 겐케이스가무 |
(여자) | ? ~ 1625년 | 계도에 기재되지 않은 인물, 고야산 안요인 과거장 근거。1625년 11월 12일 사망, 호는 쇼신인 닛쇼다이시 |
(여자) | ? ~ ? | 계도에 기재되지 않은 인물, 고야산 안요인 과거장 근거。법명은 지쓰쇼인 묘신신녀 |
(남자) | ? ~ ? | 계도에 기재되지 않은 인물, 고야산 안요인 과거장 근거。법명은 신치인 로케이주호다이도지 |
|}
6. 편휘(偏諱)를 받은 인물
모리 히데나리에게 이름 한 글자를 받은 인물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모리 '''나리'''타카 (친동생, 도쿠야마 모리가 초대)
- 모리 '''나리'''노부 (우다 모리가)
- 모리 '''나리'''나오 (나리노부의 친동생, 요시키 모리가에 양자로 들어감)
- 모리 '''나리'''카타 (아카와 모리가)
- 모리 '''나리'''야스 (나리카타의 아들)
- 모리 '''나리'''요리 (오노 모리가 초대)
- 모리 '''나리'''유키 (나리요리의 아들)
- 아소누마 '''나리'''유키 (아소누마 씨, 모리 모토나리의 일곱째 아들 아마노 모토마사의 손자)
- 아소누마 '''나리'''타다 (아소누마 씨 일문, 딸에게 마스다 나리쓰네 계실이 있음)
- 아마고 '''나리'''야스 (사사키 나리야스라고도 함, 아마고 씨)
- 우라 '''나리'''마사 (우라 씨)
- 에노모토 '''나리'''토키 (에노모토 씨, 모리 쓰나히로 시대에 당역을 맡음)
- 가타타 '''나리'''마사 (유노 영주 가타타 가문, 모리 쓰나히로 시대에 당직을 맡음)
- 깃카와 '''나리'''노리 (모리 일문·이와쿠니 영지 영주 깃카와 씨)
- 구니시 '''나리'''마사 (구니시 씨, 히데나리의 수호역·구니시 겐조의 아들)
- 시시도 '''나리'''토시 (시시도 씨, 시시도 히로마사의 동생)
- 시시도 '''나리'''나오 (시시도 히로마사의 장남)
- 시시도 '''나리'''쓰케 (나리나오의 친동생·구마가이 모토자네의 아들. 나리나오의 양자가 되어 뒤를 이음)
- 구마가이 '''나리'''자네 (구마가이 모토자네의 아들, 나리쓰케의 친동생. 친가인 아키 구마가이 씨를 계승)
- 시미즈 '''나리'''노부 (시미즈 씨)
- 스기모리 '''나리'''유키 (스기모리 씨, 스기모리 겐엔의 양자. 모리 쓰나히로 시대에 당역을 맡음)
- 나시하 '''나리'''운 (나시하 씨, 히데나리 시대의 가로로, 히데나리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순사함)
- 마스다 '''나리'''노부 (스사 영주 마스다 가문 제3대 당주, 마스다 모토타카의 아들)
- 마스다 '''나리'''쓰네 (처음 후쿠하라 모토토시의 사위, 나중에 스사 영주 마스다 가문 제6대 당주, 나리노부의 친동생)
- 이하라 '''나리'''타카 (마스다 나리노부·나리쓰네의 친동생)
- 마스다 '''나리'''카타 (마스다 가게요시의 아들)
- 무쿠노키 '''나리'''요리 (무쿠노키 씨)
- 무쿠노키 '''나리'''쓰구 (나리요리의 아들)
- 야마우치 '''나리'''미치 (빈고 야마우치 씨, 야마우치 오쿠마 히로미치의 손자, 야마우치 우네메 히로미치의 조부)
참조
[1]
문서
毛利家文書
1608-11-01 # 불확실한 날짜는 1일로 설정
[2]
문서
毛利家文書
1608-11-01 # 불확실한 날짜는 1일로 설정
[3]
서적
[4]
간행물
Full citation needed
山口県地方史学会
2010-11
[5]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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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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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서
二の丸様の顕彰碑
二の丸様顕彰会
[8]
문서
二の丸様の顕彰碑
"#二の丸様の顕彰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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